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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먼저 온 자(The first one)

시 126:1-6

이명호 담임목사 2023-03-26262

 

2023년 3월 26일 주일설교

본문: 시 126:1-6

제목: 먼저 온 자(The first one)

 

포로라는 개념은 성경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개념어 중 하나다. 구약성경 안에 나오는 전쟁은 모두 죽이는 "개멸 전법(Herem)"에 의해 적은 몰살시키고 피정복민을 포로로 만들어서 이들에게 부역을 시켰다. 앗수르의 점령 정책 가운데 도시의 상류층 및 기술자를 포로로 잡아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는 정책을 사용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포로라는 개념을 번역하는 데 사용하는 단어가 매우 많다. 그중에 히브리어 골라는 갈라라는 명사에서 온 단어로 그 뜻은 옮기다는 뜻이다. 이 밖에도 포로로 번역이 되는 단어로는 갈루트, 셰비, 쉬브야, 세비트 등 매우 많은 단어가 있다. 포로는 내가 살던 지역과 환경에서 한 번도 살아 본 적이 없는 곳으로의 이동을 뜻한다. 포로가 되고 나라가 망하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잘 보여주는 본문이 나훔 성경 3장 10절이다.

『그가 포로가 되어 사로잡혀 갔고 그의 어린 아이들은 길 모퉁이 모퉁이에 메어침을 당하여 부서졌으며 그의 존귀한 자들은 제비 뽑혀 나뉘었고 그의 모든 권세자들은 사슬에 결박되었나니』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26편은 포로 시절과 깊은 관련이 있는 성경 본분에 해당된다. 시편 126편은 너무 유명해서 이 본문을 접하면 바로 눈물 그리고 기도로 연결이 되는 본문 중 하나다.

 

정말 시편 126편은 눈물 뿌려 기도하면 되는 본문인가?

포로기 백성들이 포로 생활이 너무 힘들어 눈물을 지세운 긴 세월 동안 흘린 눈물의 기도를 말하고 있을까?

최소 적게 잡아 50년 동안의 포로생활이 너무 힘들어 눈물 마를 날이 없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하고 싶어 시편 126편이 기록되었을까?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다시 본문을 접근해 보고자 한다. 너무 익숙하고 유명한 성경 본문이 갖고 있는 맹점은 설교자와 회중 모두 성경 본문을 매우 당연한 듯이 읽고, 해석하고 적용한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도 그중 하나다.

 

특히 가장 유명한 구절이 5절 말씀이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이 구절을 읽는 사람들 안에 너무도 당연히 생각하는 것은 열심히 간절히 기도하면서 눈물을 흘리면 기쁨의 응답이 온다고 생각하며 이 본문을 읽는다. 그리고 그렇게 울어야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오로지 답은 눈물의 기도뿐이라고 설교자도 회중도 이 성경을 바라본다. 우선 시편 126편의 구조를 면밀히 볼 필요가 있다. 구조분석이 되지 않을 때 방금 말한 문제점들이 발생하는 설교와 해석 그리고 적용이 나올 수 있다.

 

본 시는 두 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가 찬양, 둘째가 기도다. 시편 주석의 대가로 알려진 엘렌 로스의 주석에도 126편은 찬양과 기도로 구성되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단순한 영적인 속박뿐만 아니라 육체적 물리적 속박에서도 벗어났음을 명확히 해 주는 성경이 시편 126편이라고 말한다.

 

첫 번째 찬양에 해당되는 단락은 1절부터 3절까지다. 그리고 나머지 4절부터 6절까지가 기도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첫째 단락인 찬송 단락의 시작이 흥미로운 점이 있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때 자신들의 입에 웃음이 가득하고 혀에는 찬송이 가득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심지어 뭇 나라들도 여호와 하나님이 큰일을 하셨다고 고백을 하는 부분이 첫 번째 단락이다. 이 첫 번째 단락은 분명 "찬양"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하신 일을 높여 드리는 부분이다. 이 단락에서 시인이 사용한 표현 중에 "그때"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현재에서 바라본 시점 즉 과거의 시점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126편의 기록 시점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본 시편을 생각해야 한다. 현재 과거 미래 시점에 따라 사건과 행동을 분석하는 기준과 이해는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에 지금 찬송 부분에 해당이 되는 "그때"가 주는 시인의 감정과 상태를 읽고 시편 126편을 접근해야 한다.

 

시인은 분명 1절에서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라고 기록한다.다시 말해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의 일을 보고 있는 것이다. 과거 즉 최소 50년 이상 포로 생활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다시 고국 땅으로 돌려보내셨던 바로 "그때"시인은 그 상황을 회상하면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는 고백을 현재에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 두 가지가 매우 중요한 시편 126편 해석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것은 먼저 "포로로 돌려보내실 때"라는 말과 "꿈꾸는 것 같았다"라는 두 개의 표현이다.

우선 포로로 돌려보내실 때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원문대로 번역하면 "여호와께서 갈림길을 돌리셨을 때"라는 말로 번역된다. 갈림길에서 돌리셨다는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갈림이란 한 길이 아닌 두 개의 길, 두 개의 선택사항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둘의 선택지 중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고국으로 복귀를 선택하셨다. 갈림길에서 어떤 길을 선택하냐는 인생의 끝이 달려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갈림길에서 돌이키셨다"라는 말은 인간의 생각이나 결정과 무관한 하나님의 능동적이고 하나님의 전폭적인 결단과 결정이 갈림길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두 번째 꿈을 꾸는 것 같았다는 표현 역시 126편 해석에 있어 매우 중요한 표현이다. 맛소라 사본은 이 부분을 "우리는 꿈꾸는 자들과 같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꿈꾸다"라는 능동형 분사가 사용이 되었는데 그 뜻은 현재 벌어진 사건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좋았다는 표현이다. 하지만 이 꿈꾸는 자가 분사이지만 수동 분사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해석이 등장한다.

그것은 '꿈꾸다'라는 단어가 수동 분사로 사용되면 "병에서 나은 환자같이" 혹은 "건강이 회복된 자들 같이"로 번역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트리니트 복음주의 신학대학원 벤 게메렌(Van Gemeren) 구약 교수는 "헬라어 번역본, 쿰란, 탈굼 그리고 불가타 성경을 보아도 우리는 나은 자들 같다, 건강이 회복된 자"와 같이 번역해야 한다고 말한다. 꿈을 꾼다는 이 표현을 사실 깊이 연구하면 그 뜻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이 히브리어 수동 분사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꿈을 꾸듯 믿기 어려운 상황, 건강이 회복될 것이라고 믿지 않았던 상황 그런 상황에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50년 동안 침상에 누워 있던 환우가 어느 날 갑자기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과 같은 표현이 "꿈꾸는 것" 같았다는 표현이다. 얼마나 믿기 힘들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는지 알 수 있다. 복귀하고 귀환할 것이라고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을 때 그들은 50년 누워있던 침상에서 벌떡 일어난 존재와 같았다는 것이다. 시편 126편을 50년 침상에서 죽을 날 만을 기다리고 있던 어떤 환우였다고 생각을 하고 상상을 한다면 결코 단순하게 6절이라고 하며 짧은 성경이네라고 말하는 정도가 아닌 성경이 된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스라엘을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는 그 귀환의 날이 꿈을 꾸듯, 건강이 회복이 되어 일어나는 환우와 같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역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건강이 회복된 자로 각도를 바꿔 2절을 보면 휠씬 더 이 시인의 고백이 피부에 와닿는다.

[126:2]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126:2] Then our mouth was filled with laughter, and our tongue with shouts of joy; then they said among the nations, "The LORD has done great things for them."

 

50년 침상에 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났을 때 본인의 입가에 있을 웃음을 상상해 보라. 그리고 그  사람의 일어섬에 대해서 주변 이웃들이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하고 있는 내 가족들과 같은 병상 옆에 있던 사람들을 보는 상상을 해 보면 지금 시인이 고백한 2절은 단순한 고백을 넘어 인생을 통째로 다시 얻은 웃음과 큰일에 해당된다. 하나님의 큰일은 50년 침상에서 절대로 일어날 수 없을 것 같고, 불가능해 보일 것 같은 일을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시편 126편은 잘 보여준다. 누가 50년 평생 병원 침상에만 있던 사람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겠는가? 포로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주셨던 말씀 가운데 전혀 이런 기대를 못하게 했을 법한 성경 본문이 있다.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Build homes, and plan to stay. Plant gardens, and eat the food they produce.

Marry and have children. Then find spouses for them so that you may have many grandchildren. Multiply! Do not dwindle away!

렘 29:5-6

 

집도 짓고, 텃밭도 만들고, 결혼도 하고 거기가 너희 집이라고 생각하고 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포로 된 백성의 삶 가운데 여전히 동일하게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도움과 은혜가 삶을 벗어나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오늘 시편 126편의 침상에서 50년 동안 누워 있던 사람의 입장에서 다시 예레미야 본문을 보면 기가 막힌다. 쉽게 말해 희망을 갖지 말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다시는 고향에 갈 생각하지 말고 그곳에서 죽고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과 같은 본문이다.

인생 안에는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일들, 기대해도 안되는 일들이 늘 존재한다. 포로에서 다시 돌아갈 생각을 단 한 번도 할 수 없던 그들의 하루하루의 삶이 그러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고국 땅으로 돌려보내신다. 다시 건강을 회복해 50년 만에 침상에서 벌떡 일어난 사람처럼 한 사람의 인생의 갈림길에서 죽음의 아닌 생명의 길로 그를 인도하고 계신 것이다.

 

오늘이, 이번 주가 어쩌면 우리의 모든 삶의 순간이 길은 두 갈림길에 그 어느 쪽을 향해도 기대와 희망보다는 죽음과 불안만 가득한 우리 인생의 갈림길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 길에서 우리의 건강을 회복하시고 다시 일어나 하나님이 준비한 땅으로 그 백성을 돌려보내 웃음이 입가에서 떠나지 않고 나를 보는 수많은 이웃들이 하나님의 큰일을 고백하는 인생이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었다는 것을 잊지 않고 감사하는 한 주간이 되길 축복합니다.

 

이렇게 현재의 삶에서 과거의 하나님이 건강을 회복시키시고, 갈림길에서 죽음의 길이 아닌 생명과 회복의 길로 인도해 주셨는데 그 하나님에 대한 큰일을 본 자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면이 본문 나머지 절에 해당된다.

4절부터 시인이 ‘~소서’라는 간구와 기도를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4절부터 6절을 해석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해석학적 방법이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어 다른 어떤 대상을 등장시켜 본문 속에서 시인이 감정을 더 표현해 내고 있는 것이다. 눈물의 씨를 뿌리면이라는 구절 하나로 우리는 기도할 때 울어야 했고, 또 눈물의 기도가 응답의 묘책이나 된 듯 울려고 노력하고 울어야 한다고 강요한다.

눈물의 씨는 기도 응답의 단을 가지고 오는가?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울어서 기도 응답받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과연 오늘 본문이 ‘포로 된 자들이여 울어라 울면 내가 응답하리라’는 구절로 등장했는가

정말 하나님은 눈물에 약하신 분인가? 

하나님의 감정과 느낌은 오로지 당신 백성의 눈물에 의해서 작동되는 감정선을 갖고 계신 분인가? 

 

이런 겉으로 나타난 질문이 어쩌면 이 본문을 보면서 했어야 함에도 많은 경우 기도 응답은 눈물의 기도라는 공식이 수십 년간 한국교회 안에 자리 잡아 이 본문은 기도회나 부흥회 때 많이 설교되는 본문이기도 하다. 이런 표면적인 질문을 던지기 전에 선행 질문이 있다. 그것은 126편에서 시인은 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가 거둔다는 이 말을 하고 있는지? 이 질문이 먼저 되면 오늘 본문을 풀어 가는데 유리하다.

 

이것을 풀기 앞서 126편이 앞장은 찬송 그리고 기도라는 큰 두 덩어리 구조라는 것을 말했다. 앞에서 이미 꿈꾸는, 건강을 회복한 것 같은 그때의 삶을 지금의 삶의 현장에서 회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시인의 이 고백은 사실 포로로 귀환해 고국 땅에 들어와 있는 사람의 고백이라는 점을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하는 본문이다. 먼저 온 자들의 노래, 기도가 오늘 126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고국으로 돌아올 때 자신들의 모습을 회상하면서 이제 4절을 기도하고 있다는 점이 126편을 해석하는데 매우 중요한 키가 된다. 왜냐하면 이미 이들은 포로에서 귀환한 자들이다. 이미 포로생활을 정리하고 자신의 땅에 들어와 있는 자들이다. 126편 제목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로 나와 있음을 보면 추정 가능한 것은 50년 만에 처음 예배를 드리러 올라가는 시점에 성전 안에 들어가 예배 자리에 앉아 있는 한 사람, 50년 동안 병원 침상에 누워살던 사람이 병상에서 내려와 예배를 드리는 본당에 앉아 눈을 감았을 때 어쩌면 지금 그 과거의 시점이 지금 시인의 고백이라고 보면 시인의 마음을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시편은 시인의 상황에서 읽고 묵상해야 한다. 그렇다면 126편은 "먼저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 중 한 사람이 그때를 기억하면서 성전 안에 혹은 성전에 올라가면서" 고백한 기도의 고백이 담긴 성경 본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질문을 해야 한다. 왜 시인은 눈물의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곡식단을 거둔다는 표현을 하고 있는가? 다시 질문하고 성경을 봐야 한다.

 

사실 눈물은 씨가 될 수 없다. 씨라 함은 땅에 심겨지는 곡식이든 나무든 식물과 나무를 만드는 작은 종자를 부르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 시인은 "눈물을 씨"라 이야기한다. 이런 표현을 언어학에서 "환유법(Metonymy)" 이라고 한다. 환유란 실제로 의미하는 바를 속성을 나타내는 단어로 대체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언어적 기법을 쓰는 이유는 단 하나다. 그것은 독자를 설득하기 위해서다. 눈물로 씨를 뿌린다에서 정말 나타내고 싶은 단어는 사실 '씨'라는 것이다. 씨가 가지고 있는 속성을 눈물을 통해 시인을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시인이 씨를 눈물을 통해 씨의 속성을 보여주고 싶어 했을까?

오늘 시편 126편은 먼저 포로로 돌아온 사람들의 성전에서의 고백과 같은 성경이다. 이들은 이미 귀환을 경험했고 그때의 감격이 얼마나 놀라웠던지 50년 만에 침상을 차고 일어난 환우의 기쁨의 웃음과 같은 모습이 지금 성전에 올라가는 한 사람의 고백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기 전에 이 사람은 무엇을 했을까?라는 질문만 던져도 오늘 시편은 쉽게 해결된다. 그것은 바로 50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일을 해야 했다는 것이다. 

성전 재건을 완료했다, 미뤘다, 늦어졌다는 것을 떠나서 최소한 이들은 50년 만에 삶의 터전으로 돌아왔다. 삶의 터전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그 시대 배경으로 다시 땅을 개간하고 땅을 통해 먹을거리를 만들고 살길을 열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1년만 땅을 갈지 않아도 그 땅을 삽이나 도구로 파내기 힘들다. 굳어서 그렇다. 50년 동안 농사하지 않던 땅에 이들이 해야 하는 일은 간단했다. 그것은 씨를 뿌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씨를 뿌리기 전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땅을 기경해야 했다.

 

씨를 왜 눈물을 통해 시인은 설명하고 싶었을까? 곡식단을 거두는 기쁨을 누리기 전인데 말이다. 그것은 아주 간단했다. 비록 지금 50년 묵은 땅을 기경하고 갈고 있지만 다 기경한 땅에 씨앗을 뿌렸을 때, 때가 되어 그 씨앗이 곡식으로 자라 열매를 거둘 때 그 기쁨으로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 감사의 눈물 기쁨의 눈물이기 때문이다. 50년 만에 돌아와 첫 농사를 지어 그 심었던 씨앗이 열매를 거두어 곡식을 거둘 때 그들 안에 어떤 기쁨의 눈물이 흘렀을까? 단순히 농사지어 먹을 것이 있어서 기쁘다는 1차원적 기쁨이 아니라 50년 세월을 거쳐 다시 자신들을 이곳에 있게 하신 하나님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삶의 터전에서 씨를 심고 열매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그들은 알게 되었다. 시인은 이 기쁨의 눈물을 씨앗을 심는 그들의 삶에서 경험했고 그것을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의 단을 거둔다고 말했다.

 

그런데 시인은 그 기쁨의 땅을 놀랍게도 "남방 시내들같이"라고 표현한다. 이스라엘 땅에서 남방은 사실 사막이다. 메마른 땅이다. 메마른 땅에서 시내가 되는 것은 엄청난 기쁨이고 감사한 일이다. 우기 건기로 구분된 이스라엘 땅은 우기가 되었을 때 급류로 마른 땅에 급격히 넘쳐나는 일들이 많은 지역이다. 따라서 그렇게 마른 땅에서 물길이 생기는 것은 50년 묵은 땅을 기경하는 그들에게 힘을 덜어주고, 수고를 덜하게 하고, 기대를 주고, 희망을 주는 것이다. 그것이 "남방 시내들 같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지금 먼저 포로에서 귀환한 이들이 남은 자들을 위한 기도를 통해 지금 우리가 50년 동안 묵었던 땅을 기경하는 동안 흘리는 눈물이 결국 씨앗 되어 곡식을 거두게 되는 추수의 때가 오듯 아직 오지 고국으로 오지 못한 그들에게 남방 시내들 같은 기쁨을 그들도 누리는 날을 달라고 시인은 기도하고 있다. 4절에서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라는 표현 속에 이미 자신만이 아닌 아직 오지 못한 동포까지 품고 기도하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다. 50년 만에 돌아와 기경하며 힘든 시간에 그들은 눈물을 흘렸고 그 수고는 고스란히 그들의 삶에 새겨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50년이 지난 땅을 기경하고 그 메마른 땅에 물이 적셔지고 다시 싹이 나고 열매 맺는 모습을 보며 그들은 그 딱딱한 땅을 기경하며 흘렸던 눈물이 결코 헛되지 않고 열매로 돌아오는 기쁨을 보고 경험했듯이 지금 이들은 아직 포로에서 돌아오지 못한 다른 사람들로 이러한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실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었다.

 

달라스 신학교 알런 로스 구약학 교수는 시편 126편의 이 장면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씨를 뿌리는 이 장면은 하나님 백성의 삶이 어떠한 지를 말해줌과 동시에 눈물은 힘들고 고난스러운 때를 말한다. 때로는 좌절의 시간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수확의 기쁨을 누리듯 아직 돌아오지 못한 바벨론 포로의 동포를 향한 기도가 담겨있다."

눈물로 열심히 기도하면 그 눈물이 하나님을 감동해서 응답이 온다는 본문과 연결하기에는 사실 본문의 구성과 그 안에 담겨 있는 환유적 비유법은 이 본문이 단순히 눈물 많이 흘리면 응답이온다의 본문이 아님을 스스로 말해 주고 있다. 먼저 온 자들은 보았다. 50년 세월을 지낸 땅을 다시 기경하고 농사 짓는 일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런데 그렇게도 힘든 일이지만 시간이 흘러 하나님이 물을 주시고 그 씨앗이 열매를 맺게 되는 기쁨을 50년이 훌쩍 넘는 세월 이후에 누리게 하신 하나님을 그들은 깨닫게 된 것이다.

 

수고의 눈물, 애씀의 눈물, 좌절의 눈물, 고통의 눈물 이것이 오늘 본문 속 눈물이다. 그런 눈물의 고된 시간 후에 얻게 된 수확의 기쁨처럼 "우리의 포로"도 그렇게 이 땅으로 돌아오는 꿈을 그들은 꾸고 있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먼저 누렸던 꿈꾸는 것, 건강이 회복되어 병상에서 벌떡 일어난 사람의 입가에 있던 그런 웃음을 경험한 그 기쁨을 나머지 사람들도 경험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 기쁨을 경험한 사람, 앞선 자는 누려보지 못한 기쁨을 경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기도가 바로 오늘 시편 126편의 기도입니다. 눈물의 기도가 응답이 온다는 기도문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이 주셨던 회복의 기쁨을 누렸던 자가 그것을 아직 누려 보지 못한 자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이 오늘 시편 126편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기도를 많이 하고, 또 기도를 많이 강조합니다. 심지어 오늘 성경을 눈물의 기도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어 줄 것을 보증수표처럼 말하며 오늘 본문을 말하곤 합니다. 오늘 시편은 50년이 훌쩍 넘는 세월도 하나님은 건강하게 회복시키고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과 먼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리게 하신 것을 가지고 나만의 만족에 만족하지 않고 이 기쁨을 누리지 못한 내 동포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있어야 함을 알려 줍니다. 건강을 회복하시는 하나님, 포로에서 다시 돌아올 것 같지 않아 집도 짓고 결혼도 하고 다 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의 방법과 시간을 따라 하나님의 회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이번 주에도 경험할 수 있길 축복합니다.동시에 다른 누구보다 먼저 하나님이 주시는 남방 땅에서 물의 차고 넘침을 경험했다면 아직 그것을 누리지 못한 누군가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는 시인과 같은 감사와 기도가 있는 한주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건강을 회복시키시고, 하나님이 남방 땅 같은 곳을 축복하시는 것은 먼저 온 자가 누렸던 은혜였습니다. 먼저 온 자였기에 그것을 보고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오늘도 먼저 온 자임을 알고 먼저 오지 못한 그 누구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눈물이 기도 응답의 조건이 아니라, 먼저 왔기에 알 수 있던 씨를 뿌려 수확을 하는 그 시간만큼 기쁨도 알게 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인과 같은 한주가 될 수 있길 축복합니다.

기도의 눈물이 응답과 연결된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각종 종교와 미신들도 다 울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울어서가 답이 아니라 건강하게 회복될 것 같지 않은 상황에 건강을 회복시키시고 남방의 바짝 마른 땅에서도 씨를 뿌려 수확의 기쁨을 누리게 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 준 성경이 시편 126편입니다.  

 

오늘 시인이 만났던 모든 것을 다시 회복시키시고, 비록 50년 묵은 땅을 기경하며 흘렸던 눈물이 어렵고 힘들었지만 결국 수학의 기쁨을 주신 하나님께서 아직 오지 못한 남은 자를 위해 기도하는 하나님 백성의 기도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돌아온 자들, 먼저 온 자들은 수고의 눈물 실패의 눈물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시인은 그렇게 힘든 눈물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눈물의 시간이 지나고 난 뒤 반드시 회복의 기쁨, 수학의 기쁨을 주듯 남아 있는 자들에게 지금 먼저 이 기쁨을 누렸던 그들처럼 그들에게도 동일한 기쁨과 회복을 주실 것을 믿고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먼저 온 자들입니다. 따라서 시편 126편처럼 기도해야 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아직 이 회복과 기쁨을 누리지 못한 영혼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도는 이런 것입니다. 먼저 누렸던 삶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은 반드시 그렇게 일하실 분이라는 확신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의 확신이 주어질 때 하나님은 먼저 온 자가 누렸던 기쁨과 감격을 또 한 번 더 허락해 주실 수 있는 분이며, 교회, 가정, 나라 그리고 개인에게 하나님이 먼저 주셨던 축복이 내가 아닌 다른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도록 축복하실 분이라는 사실을 믿고 승리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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