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주일예배

접근금지(No approaching)

레 16:1-22

이명호 담임목사 2023-04-02264

 

2023년 4월 2일 주일설교

본문: 레위기 16:1-22

제목: 접근금지(No approaching)

 

창세기 6장 14절은 노아의 방주 제작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이 본문에서 역청을 "칠하다"라는 동사가 히브리아 '카파르'다. 이 동사는 구약성경 전체 총 94회 등장한다. 모든 성경의 출발인 창세기 안에는 이 단어가 2회 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히브리어 카파르는 그 뜻이 히브리어 문법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사용된다. 하지만 크게 그 범위의 뜻을 벗어나면서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본 단어를 성경 읽고 해석하는 데 큰 무리가 없다. 그 뜻은 기본적으로 ‘덮다, 바르다’이다. 그래서 이 뜻을 사용해 창세기 6장에서는 역청을 칠하다에 사용했다. 두 번째로 이 단어는 "달래다, 고치다, 속죄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세 번째로 "제거하다, 폐지하다, 덮어지다"는 의미로 성경에서 사용된다.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 (창 32:20)

 

이 절에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히브리어 카파르가 사용됨을 알 수 있다. 카파르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뜻이 창세기 안에 등장했는데 그것은 덮고 푸는 것으로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히브리아 카파르는 단어는 덮어주고, 마음을 풀고 그래서 상했던 것들이 고쳐지고 회복이 되는데 사용되는 단어다. 그 과정은 결국 전에 있던 모든 잘못된 것들에 대한 폐지와 제거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이 단어가 때로는 폐지하다 혹은 제거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레위기 16장 성경은 "속죄일"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레위기 본문에 등장한 속죄라는 말이 앞서 설명한 창세기에 등장했던 카파르다. 쉽게 말해 레위기 16장은 덮어주고, 풀어주는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 주는 본문이다. 덮어주는, 풀어주는, 속죄하고 고치는 단어가 구약 전체에 94회 등장했다고 했다. 그런데 그중 47%에 해당되는 44회가 모두 레위기 성경에 나온다. 거의 절반에 가까운 단어가 등장한다. 레위기 성경은 덮어주고, 풀어주고, 고쳐주고, 회복하는 방법을 알려준 성경책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많이 등장한다.

 레위기에서 16장을 이해하려면 출애굽기 성경의 연속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시간적으로 성막이 만들어지고 레위기는 한 달 도 안 된 후 주어진 말씀이라는 것이다. 곧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후, 둘째 해 첫째 달(출 40:1, 34-35)과 그 해의 둘째 달(민 1:1) 사이에 쓰였다. 결국 레위기 성경은 성막을 만들고 그 성막의 목적과 기능에 있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제사를 드리고 어떠한 방법으로 드려야 하는지를 매우 자세히 기록한 성막 안에서의 제사 방법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성경이라 보면 된다. 레위기 16장 앞 단락에 해당되는 11장-15장까지는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등장한다. 그리고 레위기 17장 이후는 거룩함에 대한 요구가 등장한다. 정결과 부정 그리고 속죄 그다음에 거룩이라는 큰 흐름을 갖고 있다. 레위기 16장은 덮어주고 풀어주는 방법을 말씀하고 있지만 그 속죄와 관련 정결과 부정 그리고 거룩이라는 큰 맥락 안에서 기록되고 있다.

 

레위기 16장은 속죄에 대해 무엇을 알려주고 싶어 하는가? 레위기 16장 1절은 속죄일과 상관없어 보이는 내용으로 출발한다.

[16:1] 아론의 두 아들이 여호와 앞에 나아가다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니라

아론의 아들은 레위기 10장에 나답과 아비후로 나온다. 이들은 여호와께서 명령하지 아니한 다른 불을 가지고 여호와께 분향해서 죽임을 당한 인물들이다. 다른 불이란 결국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방식을 하나님이 명하신 방법이 아닌 자기들 마음대로 했다는 뜻이다.

이 사건을 속죄일을 설명하는 레위기 16장 시작에서 제시하고 속죄일에 관한 기록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진 16장 2절에서 성경은 "성소의 휘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아무 때나 들어오지 말라 그리하여 죽지 않도록 하라"라고 말씀하신다. 방법도, 시간도 모두 하나님이 정하신 규정을 따라서 모든 일이 이루어져야 했다. 그런데 그것을 어기면 죽음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본문에서 주목할 장소가 있다. 바로 "속죄소"다. 이 장소가 어떤 장소인지 16장 14-15절에 나온다.

[16:14] 그는 또 수송아지의 피를 가져다가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쪽에 뿌리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속죄소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16:15] 또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그 수송아지 피로 행함 같이 그 피로 행하여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릴지니

 

 최소한 본문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속죄소는 피를 뿌리는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속죄소 곧 피라는 공식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구절이다. 최소한 속죄소 주변에는 피가 흥건하게 뿌려져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속죄일에 행해지는 장면 중 하나다. 그렇다면 다시 속죄소와 피를 연결하기 앞서 그전에 어떤 준비 과정을 요청하고 계신지 본문을 통해 아는 것이 중요하다.

 

[16:6] 아론은 자기를 위한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드리되 자기와 집안을 위하여 속죄하고

[16:11] 아론은 자기를 위한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드리되 자기와 집안을 위하여 속죄하고 자기를 위한 그 속죄제 수송아지를 잡고

[16:16] 곧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들이 범한 모든 죄로 말미암아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고 또 그들의 부정한 중에 있는 회막을 위하여 그같이 할 것이요

 

 레위기 16장이 속죄의 범주를 명확히 제시하고 결국은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들이 범한 죄에 대한 속죄를 해야 하는 일임을 말해 주고 있다. 속죄의 대상과 범위를 말씀한다. 이 대상과 범위 안에 성경은 부정과 그들이 범한 모든 죄를 속죄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이렇게 속죄를 위해 필요한 재물에 대한 내용 또한 레위기 16장은 밝혀 준다.

 

[16:7] 또 그 두 염소를 가지고 회막 문 여호와 앞에 두고

[16:8]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두 염소가 등장한다. 우선 본문에 아사셀에 대한 정확한 의미 해석은 다양하다. 복음주의 신학에서는 떠나다 혹은 염소의 합성어로 보고 떠나가는 염소 정도로 해석하고 있다. 오늘 본문에서 매우 특이한 한 장면이 보인다. 레위기 16장은 안과 밖이 명확히 구분이 된다. 즉 안에서 피를 뿌리는 장면과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로 나누어져 있다. 그런데 이 점이 크게 부각이 되지 않다 보니 단순히 속죄일 규례 정도로 본문을 읽는 경우가 많다. 피를 뿌리는 장면은 분명히 속죄소를 기준으로 이루어진 일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20절 이하부터는 새로운 장면이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16:20] 그 지성소와 회막과 제단을 위하여 속죄하기를 마친 후에 살아 있는 염소를 드리되

[16:21] 아론은 그의 두 손으로 살아 있는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아뢰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16:22]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접근하기 어려운 땅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

 

 20절을 통해 제단에서 속죄가 마쳤음을 분명히 한다. 이는 안에서 행해야 하는 일이 모두 끝났음을 말한다. 그리고 이제는 죽어 있는 재물이 아닌 살아 있는 재물을 향해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를 따라 속죄일이 진행되는 장면이 매우 자세히 기록된다.

21절은 우리가 흔히 아는 안수 장면이 등장한다. 아론은 그의 두 손을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 손이 아닌 두 손으로 안수하는 장면도 목회자들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이렇게 살아 있는 재물에게 안수를 하고 그 다음에 행해지는 일이 이스라엘이 범한 모든 죄를 아뢰는 장면이 있다. 영어성경은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16:21] And Aaron shall lay both his handson the head of the live goat, and confess over it all the iniquities of the people of Israel, and all their transgressions, all their sins. And he shall put them on the head of the goat and send it away into the wilderness by the hand of a man who is in readiness.

 

죄를 고백하는 장면에서 사용된 히브리어는 야다라는 히브리어가 사용이 되었다. 이 야다는 기본적으로 던지다, 쏘다, 감사하다, 찬양하다, 고백하다 등의 매우 다양한 뜻으로 구약성경에서 사용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야다라는 단어가 하나님의 속성을 설명하는 경우 이 단어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인간의 선언 혹은 선포에 사용이 된다. 야다는 어떤 대상을 향해 던지고 헌신하고 희생한다는 의미로 사용이 될 때 가르치는 교사로도 번역되기도 한다.

지금 재물에 안수를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고백하는 시간에 사용된 야다는 1차적으로 고백의 의미를 갖고 있지만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다의적 의미로 접근한다면 매우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죄를 고백하고 난 후 "그 죄를 염소 머리에 둔다"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죄를 둔다는 이 개념에 사용된 히브리어 '나탄'이 오늘 본문처럼 죄에 대한 대가가 지불되는 법률 개념 일 때, 지불을 하다 대부하다라는 뜻이 된다. 다시 말해 지금 염소가 모든 죄에 대한 값을 지불하고 있는 장면으로 성경은 기록되어 있다. 죄는 인간이 지었지만 그 죄의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대상은 염소가 되는 장면이다. 말 없는 염소, 자신의 머리에 왜 두 손이 올려진 채 인간이란 존재가 뭐라고 말은 하는데 그 뜻은 모른 채 그 고백한 죄가 그 염소 머리 위에 세워지게 되는 장면이다.

 

 이렇게 죄를 모두 머리에 세운(히브리어 나탄은 물건을 세우고, 나라를 세우고, 왕을 세울 때가 더 많이 사용된다) 염소를 설명하고 매우 특이한 장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라고 기록되어 있다. 염소에게 안수를 하고 죄를 고백하고 멀뚱히 서 있을 그 염소를 데리고 갈 사람이 미리 정해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미 약속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무나 그 염소를 끌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해진 사람이 사전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에게 그 염소를 맡기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람이 그 염소를 데리고 가는 장소가 오늘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16:22] 광야로 보낼지니 접근하기 어려운 땅에 이르거든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

[16:22] As the goat goes into the wilderness, it will carry all the people's sins upon itself into a desolate land.

 

 영어 성경은 고독한 땅, 외로운 땅 아무도 관계되지 않는 땅으로 그 염소를 놓으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전에 접근하기 어려운 땅에 이르게 되면 그곳에서 그 염소를 놓아주라고 말한다. 본문에 놓아준다는 말은 풀어준다는 히브리어 '살라흐'라는 말이다. 이 단어는 자유를 주다, 펴다, 전개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놓아주는 것은 묶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유와 펼쳐짐의 뜻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단어다. 그런데 지금 놓아준 대상이 염소라는 점과 그 염소를 풀어준 장소에 주목해야 한다. "접근하기 어려운 땅"이라 나와 있다. 히브리어 성경은 "바로 그 광야"라고 기록되어 있다. 어떤 광야인지, 어떤 접근하기 힘든 곳인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염소 한 마리가 가야 하는 길이 결코 쉬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광야에서 접근이 어렵다는 말은 죽음이 있는 곳, 죽어야 하는 장소라는 뜻이다. 지금 염소가 선택받은 사람에 의해 이동한 그곳은 이미 지정된 곳 이미 정해진 그 죽음의 장소까지 끌려갔고 그곳에서 그 염소는 풀리고 아무도 접근하기 힘든 곳으로 들어가게 된다. 접근하기 힘들었다는 말은 죽었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 맞다. 속죄일날 두 마리 염소는 둘 다 결국 죽어야 하는 처지였다. 한 마리는 속죄소 주변에 피로 뿌려졌고 다른 한 마리는 지정된 장소로 끌려가 결국 죽어야 했다. 죄를 그 머리에 다 세우고 있는 그 염소가 들어간 곳은 바로 그 광야 아무도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그래서 그냥 죽어야 하는 곳에 염소가 들어갔고 그곳에서 죽어야 했다.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 속죄일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은 죄를 해결하는 놀라운 방법을 보여주고 계신 모습이다.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있어야 하고, 그곳에서 걷고 살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그대로 죽어야 하는 그 염소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의 문제를 처리해 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보여주고 계신다. 접근하기 힘든 지역에 염소가 풀린 이 장면이 주는 매우 중요한 죄 문제 해결에 대한 하나님의 방식이 보인다. 그것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게 한다는 점이다.

한번 접근하기 힘든 곳으로 간 염소는 죽어야 하는 것이다. 살 수 없는 곳에 풀리게 되고 그곳은 사실 자유가 아닌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갔다는 것이다. 인간의 지은 죄 내가 지은 죄를 하나님이 처리하실 때 누구도 접근하기 힘든 지역에 우리의 죄가 위치하도록 하신다. 그 염소가 어디까지 갈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내가 지은 죄를 그 염소가 가지고 더 멀리 더 멀리 가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처리하는 방식이 오늘 안과 밖에서 동시에 있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해 안에서 피를 뿌리는 이 장면은 거룩이라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피가 거룩을 주는 것임을 성경이 명확히 밝혀주고 있는 장면이다. 또한 접근하기 힘든 광야로 나가는 장면은 죄가 더 이상 힘을 발휘하거나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거룩하게 하시고, 다시는 죄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게 하시는 죄 처리 방식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한 번에 끝낸 사건이 십자가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오늘 접근하기 힘든 곳에 이른 염소는 누구도 접근하기 힘든 곳까지 갔고 그곳에서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결국 죽음만 기다리고 있다. 레위기 16장 "접근하기 어려운 땅" 이곳은 그 누구도 갈 수 없고, 가서는 안되는 곳이다. 그 염소는 가서 죽어야 하는 곳이 바로 접근하기 어려운 땅이다.

레위기 16장 22절에서 접근하기 어려운 땅에 들어간 염소에게 주어진 몫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모든 불의를 지고"라는 표현이다. 히브리어 ‘나사’라는 말로 이 말은 이사야 53장에 "질고를 지고"에도 동일하게 사용되는 표현이다. 레위기 16장은 이미 속죄일 규례를 통해 십자가가 어떤 역할을 하고 십자가가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의미를 설명해 준다. 그것은 염소 머리에 우뚝 세워진 내가 지은 죄를 짊어지고 "접근하기 어려운 땅"에 간 염소의 모습 속에 십자가의 놀라운 신비와 비밀을 담아 두었다는 점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해가 가슴으로 다가오지 않을 때 레위기 16장은 십자가 신비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려 준다.

우선 접근하기 어려운 땅을 먼저 기억해야 한다. 이스라엘 땅에서 접근하기 어렵다는 것은 전쟁가운데 요새와 같은 곳으로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땅을 말할 때도 사용한다. 그러나 오늘 레위기 16장은 인생의 죄를 짊어지고 가는 염소에게 있어 접근하기 어려운 곳은 그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곳을 뜻하는 바로 접근하기 어려운 땅이다. 결국 그 어떤 도움으로 생존할 수 없는 그곳이 바로 접근하기 어려운 땅이라는 뜻이다.

 

두 번째 접근하기 어려운 땅이란 곧 죽음을 뜻하는 장소다. 한번 들어가면 길이 없는 곳, 생명의 길이 어딘지 모르는 죽음의 길만이 존재하는 곳 그곳이 바로 접근하기 어려운 땅을 뜻한다.

 

세 번째 접근하기 어려운 땅이란 이미 준비된 사람을 통해 그 염소를 끌고 갔다는 점에서 돌이킬 수 없는 장소라는 것이다. 이미 정해졌다는 뜻이다. 그곳으로 가야만 하는 것으로 정해져 버렸다는 것을 뜻한다.

안수 받고 죄를 짊어지고 선택받은 사람에 의해 접근하기 어려운 땅에 가고 있는 염소 한 마리가 감당해야 하는 곳 “접근하기 어려운 땅” 그곳은 생존이 불가능한 지역이다. 죽음이다. 예수님의 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었다는 것은 "인생이 접근하기 힘든 땅"에 나의 죄가 그곳에 위치하도록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염소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접근하기 힘든 곳에서 죽음을 맞이하듯 십자가와 죄의 관계란 내가 다시는 가져올 수 없는 곳에 죄가 위치했다는 뜻이다. 즉 "인생의 힘으로는 그 죄를 다시 가져올 수 없다"라는 뜻이다. 이것이 십자가의 놀라운 신비다. 우리가 한번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었다는 것은 이미 접근하기 힘든 지역 안에 이미 우리의 죄가 놓였다는 뜻이다. 이는 더 이상 인생이 그 죄를 내 것인 양 붙였다 떼었다 하는 식의 개념이 성립이 될 수 없는 것이 십자가와 죄의 개념 이해다.

 

 접근하기 어려운 그 광야로 끌고 간 염소를 그 광야에 놓는 것은 십자가가 인생을 향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지 볼 수 있다. 지정된 사람이, 지정된 염소를 데리고 지정된 장소까지 가서 그 염소를 접근하기 어려운 땅 광야 중에서도 정해진 한 지점을 정해 그곳에 풀어준 것은 염소에게는 자유와 죽음 동시에 그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으로 들어간 그 염소에 내 죄가 함께 "접근하기 어려운 땅"에 들어갔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더 이상 그 죄가 나와 상관없고, 더 이상 그 죄가 나에게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접근하기 어려운 땅에 들어간 염소를 통해 말해 주고 있다. 십자가에 내 죄가 위치했다는 것은 레위기 본문에 따르면 “접근하기 어려운 땅“에 죄가 위치한 것이다. 가서 그 죄를 짊어진 염소가 죽는 것을 뜻하듯 십자가에 내 죄를 위치시키고 고백했다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접근할 땅"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

 

고난 주간과 십자가를 1년에 한번씩 최소한 지금 이 기간에 우리는 묵상한다. 십자가는 “접근하기 어려운 땅“을 뜻한다. 십자가는 단순한 개념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내 죄가 나로부터 멀어져서 더 이상 접근할 수 없는 영역에 그 죄가 위치했고 "가서 죽었어"라고 말해 주고 있는 것이 십자가다.

달라스 신학교 구약학 교수인 마크 루커(Mark F. Rooker) "피를 뿌려 재단에서 거룩을 회복하시고 이제는 밖으로 나와 접근하기 어려운 땅으로 염소를 보내는 이 장면은 다윗이 시편 103편 12절의 고백을 그대로 담고 있다 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시편 103편 12절은 다음과 같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본문에 다윗이 사용한 "죄과를 우리에게서 옮기셨다"라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죄과라는 히브리어 페사는 반역과 거부를 뜻한다. 그런데 이 반역과 거부는 반드시 하나님이 없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살 때 인간이 범하는 모든 죄를 뜻한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게 하나님 없이 살던 인간의 죄를 옮기셨다고 말한다. 말 그대로 멀리 보냈다 그래서 나와 가까워질 수 없다는 말이다. 오늘 레위기 16장 성경에 염소를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는 땅에 위치시켰던 것처럼 십자가를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없이 살던 우리의 모든 죄와 반역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 죄의 전부를 다시는 접근하기 힘든 땅에 보냈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라는 것이다. 십자가를 믿습니까?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이지만 그보다 더 깊이 있는 고백이 있다. 그것이 오늘 다윗이 고백한 죄과를 멀리 보냈다는 뜻이다. 다시는 접근할 수 없는 땅, 그곳이 바로 십자가라는 위치다. 인간 중 누가 십자가에서 죽어 나의 죄를 짊어지고 죽겠는가? 그래서 인생의 그 어떤 한 사람도 접근하기 어려운 땅에 속한 신의 영역이 곧 십자가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에 우리 죄과가 우리의 반역이 위치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이것을 안다는 것은 오늘 레위기 본문을 통해 생각해 보면 "다시는 접근하기 힘든 땅"에 나의 죄가 위치했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반역과 배신 그리고 불의와 불법을 십자가에 위치한 존재는 저와 여러분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지은 죄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십자가 앞에 가져올 수 있는 단계까지는 인간의 몫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 인간이 절대로 하지 못하는 영역 즉 접근하기 힘든 영역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고백으로 십자가에 위치시킨 내 죄를 내가 다시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우리가 고백해서 위치시킨 죄가 죽었기에 그 죄가 더 이상 여러분의 것이 아님을 성경은 알려 줍니다. 그런데 한 가지 모든 신앙인들이 끊임없이 실수하는 것이 접근하지 못하는 땅에 접근하려고 노력을 하거나, 심지어 그 염소 뒤를 밟고 따라와서 다시 집으로 끌고 가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가 왜 능력이라 말을 하는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믿고 안다는 것은 더 이상 “접근하기 힘든 곳 다시 말해 신의 영역에 내 죄가 해결되고 그분이 가져갔다는 개념” 이것이 십자가의 신비이고 십자가의 축복입니다. 이런 "만약"은 존재하지 않지만 다음의 만약을 상상해 보겠습니다. 신이 인간은 접근하기 힘든 곳에 내 죄를 가져가셨다가 나중에 생각해 보니 이 죄는 아니다 싶어 만약 돌려보내신다면 어떻겠습니까? 안수까지 받고 멀리멀리 보냈다고 생각한 그 끔찍한 죄를 다시 나에게 돌려보내신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단 한번도 그런적이 없습니다.

 

 이번 한주 고난과 부활을 고백하고 묵상하면서 우리가 정말 실수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접근하기 힘든 땅에 이제는 더 이상 가려고 애쓰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또한 그 접근하기 힘든 곳은 하나님이 정하시고, 하나님이 세우신 법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의 영역이지 내가 하나님께 줬다 뺐었다 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믿음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께 다 드린 것이고 그 예수님의 죽음이 내 반역을 가져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신의 영역에 과감히 도전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십자가 위치한 그 죄를 그 반역을 그 죄과를 다시 가져오고 다시 나에게 가까이 두는 것입니다.

 

 이번 주 고난을 묵상하면서 너무도 멀리 가버린 나의 죄를 다시 내 옆으로 가져오지 않는 한 주간이 될 수 있길 축복합니다 인생이 접근하지 말아야 하는 접근 금지구역이 있으니 그것은 내가 고백해 위치시켜 버린 그 죄에 대해서 더 이상 내가 접근할 수 없는 곳 바로 십자가입니다.


 접근하기 어려운 땅 이젠 그만 가시는 삶을 살 수 있길 축복합니다. 멀리멀리 가서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를 염소의 죽음을 "죽었겠지 이젠"이라고 추정한 구약백성과 십자가 믿음으로 "다 죽었어 이미"를 고백하는 여러분과는 하늘과 땅 차이의 영적인 삶을 살고 있음을 잊지 않는 한 주간 되길 축복합니다.

내용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