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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소원을 말해봐(Tell me your wish)

빌 2:12-13

이명호 담임목사 2023-03-19208

 

2023년 3월 19일 주일설교

본문: 빌 2:12-13

제목: 소원을 말해봐 (Tell me your wish)

 

사도바울은 주후 50년경 소아시아에서 마게도냐로 건너온다. 그 첫 성이 빌립보라는 도시다. 사도행전 16장 12절은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 12절에서 주목할 대목이 있다. 그것은 "로마의 식민지"였다는 부분이다. 흔히 속주 도시가 빌립보 도시였다. 바울 당시 식민지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나라 백성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신학자들은 이 당시 빌립보는 제도, 건축, 주화 등을 로마를 본뜨려고 애를 썼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당연한 해석일 수 있다. 이 시대 로마의 지배 앞에 "NO"라고 외칠 나라가 없었다는 점에서 빌립보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로마 속국은 로마처럼 로마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야 했던 시대였다.

빌립보 주민들의 구성은 주로 이탈리아에서 추방된 사람들과 주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이후 벌어진 로마 내전의 여파로 그곳에 정착 한 사람들이었다.

이방인, 추방자, 도망자 등 다양한 사연을 가진 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 빌립보 도시였다. 빌리보서 1장을 보면 이 도시에 있던 일들을 추정해 볼 수 있는 바울의 언급이 등장하는 데 예를 들면 투기 분쟁, 복음의 변증 같은 단어들이다. 아마도 유대인들 혹은 유대인에게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 간의 변론과 논쟁이 진행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결정적으로 빌립보서 1장 18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1: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1:18] So how am I to respond? I've decided that I really don't care about their motives, whether mixed, bad, or indifferent. Every time one of them opens his mouth, Christ is proclaimed, so I just cheer them on! And I'm going to keep that celebration going

18절을 한마디로 말하면 그 어떤 것이 썩든, 말해지든 결국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뿐이라고 딱 잘라 말한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영어 성경은 동기에도 관심 없고, 뭐가 혼합되어 있든, 나쁜 것이든, 다른 것이든 전혀 상관없다고 말하고 있다. 복음이 그런 것이다. 이런 사상, 저런 사상, 이런 주장, 저런 주장 이 난무하는 빌립보 시대나, 또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시대 역시 제아무리 잘난 사상도 철학도 복음을 변질시키거나 복음이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18절에서 이보다 더 흥미롭고 중요한 점을 하나 발견해야 한다. 그것은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기뻐한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바울의 기쁨이 복음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쁨의 출발이 오로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기쁨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복음 전파에 대한 기쁨이 얼마나 큰 사람이 바울인지 그는 다시 1장 20절에서 고백한다. 너무도 유명한 고백을 한다.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1:20] as it is my eager expectation and hope that I will not be at all ashamed, but that with full courage now as always Christ will be honored in my body, whether by life or by death.

복음 전파에 대한 기쁨 그리고 그 사명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죽음과도 바꿀 수 있다고 바울은 고백한다. 빌립보교회를 향해 이렇게 복음 전파의 사명과 그 복을 변증할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고려해 편지를 작성해 보냈다.

휘튼 칼리지의 제럴드 F. 호손, 달라스 신학교의 에드윈 A 블룸, 트리니트 복음주의 신학교의 그랜트 R. 오스븐 등의 교수들은 빌립보 성경은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는 성경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지금 바울이 고백하고 있는 복음 전파로 인한 기쁨과 그 시대 사람들이 누리고 알고 있는 기쁨과의 분명한 차이점을 밝혀 주고 있는 편지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복음으로 인한 기쁨, 복음 자체가 주는 기쁨에 대한 충분한 누림과 만족을 아는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빌립보서 1장 27절에서 뼈 있는 한 마디를 던진다.

[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1: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할 것을 말함과 동시에 대적자들이 있음을 말해 주고 있는 점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합당한 삶을 요청하지만 바울은 그들 가운데 대적들로 인한 두려움이 있었음을 알고 그 부분까지 꼼꼼하게 편지에 담았다. 그런데 이 절 안에 바울은 자신이 빌립보 성도들 곁에 없음을 분명히 한다. 떠나 있는 자신의 상황을 말한다. 이 떠나 있는 바울의 상황을 오늘 설교 본문에 해당되는 2장 12절에서 다시 바울은 언급한다.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장에서도 2장에서도 바울은 자신이 없는 상황을 언급한다. 그런데 자신의 부재 상황 속에서 바울은 1장에서 합당한 삶을 살고 두려워하지 말 것을 언급하고 2장에 왔을 때 자신의 부재 상황에서 빌립보 성도들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을 오늘 본문이 밝혀 준다. 바울이 없지만, 바울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빌립보 성도들이 반드시 이것만은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본문이 2장 12절-13절이다.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이 본문은 매우 유명한 본문으로 해석상의 어려움이 많다 등의 말을 하는 설교지만 사실 해석상의 문제가 될 하등의 이유가 없는 본문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 박사학위 소지한 사람이 읽도록 이 편지를 쓰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당시 식민지 공식 공용어가 라틴어였기는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헬라어를 쓸 줄 알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전혀 어렵지 않은 편지라는 점이다. 또한 많은 설교자들이 이 구절은 어렵다 그러니 설교 잘 들어야 이해한다는 협박식으로 청중을 유도하고 이 본문을 풀지만 바울은 지혜와 총명이 솔로몬 같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가 읽는 독자를 무시한 편지를 쓸 일이 없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시작은 "그러므로" 다. 1장부터 12절 앞 까지를 모두 말해 준다. 그러므로는 그 앞단락을 받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면 간단하다. 그 앞 단락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과 같은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단락이다. 비움의 단계를 넘어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다.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모든 무릎"을 꿇게 하신다고 이야기한다.

오늘 설교 본문 보다 더 중요시해야 하는 해석이 바로 앞에 등장한 그리스도 예수의 태도를 갖는 것이다. 비움, 낮아짐을 바울은 앞 단락에서 말했다. 그리고 그는 "그러므로"의 결과 절로 오늘 설교 본문을 받고 있다. 따라서 너희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절이 오늘 설교 본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비움과 낮아짐,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쉽게 말해 성도가 된 너희들, 구원받은 너희들은 어떤 결과를 나타내야 하는지를 이어서 말한 절이 "그러므로"로 시작한 12절-13절이다.

12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낮아짐이 그리스도의 비움의 결과로 구원을 얻은 성도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을 "구원을 이루라"라는 부분이다. 이 부분을 놓고 이 절이 어렵다 힘들다 논쟁하지만 영어 성경만 봐도 이 구절이 어렵지 않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12] Dear friends, you always followed my instructions when I was with you. And now that I am away, it is even more important. Work hard to show the results of your salvation, obeying God with deep reverence and fear.

[13] For it is God who works in you, both to will and to work for his good pleasure.

 

12절에서는 구원의 결과를 보이며 사는 것을 말한다. 간단히 말해 구원받은 증거를 보이며, 구원받은 백성답게 사는 모습 보이는 것을 바울은 이야기한다. 따라서 구원의 주체가 누구니 이런 논쟁을 가지고 설교 시간에 논할 가치가 없는 절이다. 또한 13절도 이미 하나님 자신이 일하고 있는 분임을 모두 설명하고 있는 본문이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증거한다. 이것이 왜 타당성이 있는지 헬라어 원문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13절을 헬라어 어순을 따라 직역을 하면

"하나님 그러므로 이다 일하고 계시는 너희들 안에서 그리고 소망을(to 부정사) 위하여 그리고 일하기(to 부정사) 위하여 관련해(위하여, 때문에) 기쁨의"   

헬라어 성경은 이미 이 문장의 핵심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시작한다. 헬라어가 가진 가장 큰 장점 중 하나가 "어순의 변화를 통한 강조법"이다. 언제든지 저자의 의도를 따라 어순을 이리저리 바꿀 수 있는 언어가 헬라어다. 기본 구조를 갖고는 있지만 어순에 따라 저자의 생각을 읽어 내는 데 도움이 된다.

바울의 말을 쉽게 풀면"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이다"라고 정리되는 헬라어 문장이고 이것을 영어 성경은 하나님이 주어로 등장하거나 하나님을 관계사를 통해 하나뿐인 명사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결국,하나님의 비우심, 낮아지심의 결과 하나님이 또 한 번 일하게 되시는 장면을 연이어 말한 것이나 같은 절이다. 엄청난 반복 강조인 것이다. 본문에 너희 구원을 이루라를 가지고 논쟁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이미 헬라어 본문 자체가 하나님이 주어로 나온 문장에서 이 구원을 이룸은 인간에게 맞추어진 해석적 논리는 사실 의미가 없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분이 일하신 결과로 구원을 얻었다면 결국 너희들 삶에 구원받은 백성의 모습을 보이며 살라는 것을 바울은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이 이렇게 비우셨다, 하나님이 이렇게 낮아지셨다. 그래서 너희가 구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이 너희 안에서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혹은 기쁨에 관하여) 소망을 두고 하나님 스스로 일하신다는 절이 바로 13절이다.결국 하나님은 구원하신 백성들 안에서 일을 하시는데 그 이유가 결국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일하고 계시며 그 하나님의 일하심 가운데 하나님은 구원받은 백성들 안에 소망을 갖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일을 하신다. 그 일이라 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비움을 통해 구원받은 빌립보 성도들 안에 “소망을” 갖게 하시면서 그들 안에서 일하신다. 구원받은 백성 가운데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기쁨을 위해 일하고 계신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비움을 말했던 12절 앞 단락에서 매우 중요하게 등장시킨 어휘가 있다. 그것은 바로 "복종"이라는 단어다. 그런데 이 단어를 12절 그러므로 결과절을 설명하면서 그 복종을 언급하고 있다.

즉 현재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에 관해 쭉 설명했다. 그리고 그 구원받은 백성 안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언급한다.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바울의 기록법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1장 27절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 바 있다. 2장과 비교를 해 보면 바울의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명확히 알 수 있다.

[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지금 바울이 1장에서 복음의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빌립보 성도들을 권면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2장에서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설명하고 너희가 그분으로 인해 구원을 얻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복종하듯 그들에게도 복종을 말씀하는데 그 환경은 "바울이 없다"는데 있다. 바울은 지금 첫 번째 교회 개척인 빌립보 교회를 향해 지속적으로 1장에도 언급하고 2장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것이 복음이다. 그런데 그 복음과 관련해 바울이 상황적인 이야기를 속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울이 없다" "바울의 부재" "바울이 보이지 않는 상황"을 이야기한다.

담임목사가 보이지 않는 상황,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 상황, 이끌고 갈 사람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 안에 있는 다양한 문제들, 두려움들에 관해 "복음"을 이야기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처해 있는 "보이지 않음"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그런데 바울의 보이지 않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너희 믿음의 사람들 안에서 소망을 갖게 하시고 일을 지금도 하고 계시기 때문에 다른 말로 바꾸면 하나님의 기쁨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내가 없는 그 상황에서도 복음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고 일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바울의 놀라운 점은 자신이 없는 상황을 명확히 말한다는 것이고 바울이 없음으로 인해 그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도 그는 모두 밝히 짐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이 그 모든 상황 가운데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복종하듯 너희도 내가 비록 보이지 않지만 복음 앞에 복종하는 삶을 살 것을 권면하고 있다.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쓴 이 편지에서 바울이 위대한 이유는 무조건 복종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단순히 내가 안 보이니까 복종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자신이 있든 없든 너희가 복종을 해야 하는 이유는 바울 나 때문이 아니라, 복음 때문이라는 것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복종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알려 주고 있다는 것이다. 복종의 동기와 복종의 출발 과정 결과 모두 복음 하나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복종은 무조건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너보다 위에 있고, 선배이고, 살아온 세월도 많고, 배운 것도 많고, 재력도 되고, 못한 게 없으니까 넌 나에게 복종해 내가 명령한 것을 다 받아들여야 해! 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복종을 강요하는 곳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인 것이다. 바울의 위대한 부분이 지금 자신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놓여 있는 교회를향해 던지고 있는 메시지의 핵심을 기억해야 한다. 자신이 있거나 없거나교회 성도는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하는데 첫째 복음 둘째 그 복음에 대한 순종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복음과 그에 대한 순종이 될 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 안에서 소망을 두고 당신의 기쁨과 관련된 일들을 시작하시고 성취해 가진다는 것을 바울은 말씀하고 있다.

빌립보 교회를 향해 바울이 지금 1장과 2장에서 계속 말하고 있는 부분이 "자신이 있든 없든"이다. 이 말속에는 최소한 한 가지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울이 있을 때와 바울이 없을 때 빌립보 교회의 모습이 달라졌을 것을 짐작하게 한다. 이것이 매우 개연성 있는 추측인 이유는 바울은 1장과 2장에서 빌립보 교회 안에 있을 법한 다양한 상황들과 표현들을 통해 현재 그 교회가 상황적으로 좋은 형편은 분명 아님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결국 바울은 자신과 상관없이 그들에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빌립보 교인들에게 말해 주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13절 말씀 가운데 "너희 안에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는 이 구절을 단순히 읽고 암송하지만 앞서 살펴본 대로 이 13절의 헬라어 성경은 "하나님이 그러므로 일하고 있다"라고 번역된다.

다시 말해, 지금 바울의 핵심은 하나님은 일하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말해 주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일하심이 아무에게나 일하심이 아니라 앞 단락에서 제시한 그리스도의 낮아짐과 비우심을 믿는 자들 가운데 하나님은 일하신다는 것이다. 그것도 믿는 자의 기쁨과 만족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 목적을 위해 하나님 스스로가 일하신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이 하시는 일, 하나님 스스로가 기뻐하시는 일로 인해 바울이라는 사람과 상관없이, 바울이 목회를 하든 안 하든, 바울이 강단을 지키든 안 지키든, 하나님의 교회와 그리스도의 낮아짐과 비우심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일하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바울은 "내가 있든 없든"이라는 표현으로 계속 "바울의 부재가 하나님의 부재가 아님"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매우 좋아한다. 그런데 이 말씀을 암송하고 이 말씀을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말하기 앞서 바울이 전제한 것이 바로 12절 앞에 사용한 "그러므로"라는 결과절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즉, 결과적으로 앞에 있던 "그 무엇"이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소원을 두실 수 있는 "그 어떤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무엇과 그 어떤"이 무엇인지는 간단하다. 그 무엇은 결국 그리스도의 비움과 낮아지심이 그 무엇이고, 그 어떤 자는 결국 그 낮아짐과 비움이라는 십자가의 복종을 믿는 자라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 안에 소원을 두시고 행하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방적 일하심만을 전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 하나님의 전폭적인 일하심과 하나님의 능력은 아무에게나 임하거나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희생 그리고 그분의 낮아짐과 비움을 "믿는 자"에게만 하나님은 "소원을 두고" 일하신다는 것이다.이는 신앙생활을 할 때 주일 안 빠지고, 십일조 항상 하고, 봉사 매년 하고, 전도 엄청 하고, 성경 수백 독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소원을 두고 행하심이 아닌 본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소원을 두는 인물, 하나님 자신의 기쁨을 따라 소원을 두는 사람이 따로 있으니 그 사람은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낮아짐과 비움을 믿는 자 그렇게 그분을 믿고 그 복음에 합당한 삶을 매일 살아가는 사람들 안에 하나님은 소원을 두고 일하신다는 것이다.

결국 바울은 내가 있든 없든을 반복하면서 하나님의 일하심은 결국 바울과 전혀 상관없이 복음을 제대로 믿는 자라면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든지 사람이 누구냐 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일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쁨이고 하나님 본연의 일이라고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권면하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아니 늘 언제나 세상이 존재하기 전부터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일하심이란 우리가 어떤 행위로 교회에서 살아왔던 시간과 비례한다거나, 우리의 헌금, 우리의 노력, 우리의 기도 시간, 우리의 봉사시간과 전혀 상관없다는 것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전합니다. 하나님이 오로지 소원을 두고 일하시는 유일한 사람, 유일한 길은 오로지 십자가의 낮아짐과 비움이라는 복종을 믿는 자 그래서 매일의 삶에 사람 앞에 복종하는 자가 아니라 복음 앞에 복종하는 자 그런 자에게 하나님은 스스로의 기쁨을 이루기 위해 그들 안에 소원을 두신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혹시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순장님, 목자님 소리 듣고 계십니까? 그럼 그만큼 세월도 많이 흘러 교회생활에 아주 익숙하시겠네요? 시간을 많이 보내서 교회에 익숙해서 내가 이 일도 잘하고 저 일도 잘하고 이 일도 해 봤고 저 일도 잘 했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비움과 낮아지심의 복종인 십자가를 믿는 것”은 별개라는 것 아시나요? 왜 별개인 것을 단언할 수 있는지 아시나요? 그것은 나는 이미 누가 말하지 않아도 내 속에서 십자가 복음이 없이 소위 속된 말로 "교회 짬밥"으로 일하고 있는 것을 내가 가장 잘 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없어도, 장로님이 없어도, 권사님이 없어도, 집사님이 없어도 교회가 움직여진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바울은 내가 있든 없든 하나님 스스로가 교회를 향해 갖고 계신 기쁨의 목적을 위해 일하고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담임목사, 당회, 권사, 집사 없어도 하나님은 교회를 이끌어 가시는 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것이지 담임목사, 당회, 권사, 집사의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헌신의 시간, 헌금의 양으로 교회에 주권을 행사하고 있는 담임목사, 장로, 권사, 집사라면 이미 죄송하지만 "아웃"입니다. 그 정도 수준 가지고 담임목사, 장로, 권사, 집사로 살 거면 세상에 나가서 어느 교회 담임목사, 장로, 권사, 집사라고 말하지 않는 편이 휠씬 나을 것입니다. 직분과 교회에서 보낸 세월 자랑하지 말고, 내가 그리스도의 낮아짐과 비움을 믿고 또 그분처럼 그렇게 복종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부터 결산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어려운 이유는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비움보다 직분과 교회에서의 세월 자랑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한일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복음과는 상관없는 힘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 주는 낮아지고 비워진 복음을 믿은 내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 되길 축복합니다. 내 안에서 일하고 있는 하나님이 없다면 그것은 간단합니다. 당신 안에 낮아지고 비워진 십자가 복음이 없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인생이기에 그 안에서는 하나님의 소원을 두 실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 한 분 한 분 안에 낮아짐과 비움의 십자가를 믿어 하나님이 마음껏 여러분 안에서 소원을 둘 수 있는 그런 자격을 갖춘 하나님이 일하시는 통로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소원을 말해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소원은 내가 말한다고, 내가 소원을 갖고 있다고, 내가 말만 하면 다 이루어지고 기도하면 다 되는 그런 소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원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십자의 낮아지심과 비움을 믿는 자 안에서 하나님 스스로의 기쁨을 위해 소원을 두고 일하시는 그 소원을 뜻한다는 것을 잊지 않는 모든 성도들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소원을 말해봐! 가 먼저 가 아닙니다. 낮아짐과 비움의 십자가를 내 안에 믿고 있는지가 먼저입니다. 그것이 되면 그다음부터는 하나님이 그 십자가의 믿음을 가진 사람 안에 소원을 두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다운 삶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기 위해 일하실 것입니다. 이번 한주가 그렇게 내 소원 말하는 한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한주가 될 수 있길 축복합니다.

낮아짐(십자가) 없는 소원, 비움(십자가) 없는 소원 모두 내 소원일 뿐 하나님과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낮아짐과 비움으로 인한 복음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차라리 이것도 바라고 저것도 바라고, 이 소원도 있고, 저 소원도 있고 하지 않는 편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제대로 숨어 지내는 비결 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내가 그리스도인이라 하면 뭔가 하나님의 기적이 있을 것처럼 보지만, 하나님의 일하심은 십자가와 상관없이 비움과 낮아짐 없는 하나님의 일하심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그것을 분명히 가르쳤습니다. 여러분의 소원이 다 하나님의 소원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의 유일한 소원의 출발 과정 결과 모두 십자가로 시작되고 끝나야 하는 소원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믿음의 사람이 되면 하나님이 당신의 기쁨을 두고 그 믿음의 사람 안에 소원을 두시고 일하십니다. 소원을 말해봐 하면 누구나 좋아합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사람들은 소원을 말해봐라는 말 자체에 흥분하고 기뻐하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해 주는 소원은 모두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비움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에 매주 출석하는 불교 신자, 교회에 매주 출석하는 원불교 신자, 교회에 매주 출석하는 무속신앙인, 교회에 매주 출석하는 불신앙자가 어느 교회나 어느 시대나 반드시 존재했습니다. 그들도 각자 교회의 성스러운 분위기, 거룩해 보이는 담임목사의 검고 붉은 가운, 녹음기 틀어 놓은 듯 줄줄 흘러나오는 장로들의 대표 기도 소리를 들으며 “교회 오면 이런 볼거리가 있어 좋아”하고 그들도 기도 시간에 십자가의 낮아짐과 비움 그리고 그분의 죽음과 전혀 상관없이 자신들의 “간절한 소원”을 그 어떤 신을 향해 구합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10년, 평생을 그리스도의 비움과 낮아짐으로 인해, 우리 안에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 때문에 주어지는 소원은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원을 말하기 전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지부터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내가 나의 간절한 소원이 십자가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부터 물어봐야 합니다. 만약 이러한 질문이 없다면 교회의 담임목사, 장로, 권사, 집사가 십자가와 상관없이 교회 출석하고, 설교하고, 대표 기도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소원은 십자가로부터 시작되고 십자가의 과정을 통과할 때 하나님 스스로 그 십자가의 낮아짐과 비움을 믿는 성도의 삶 속에서 일하시게 됩니다. 낮아짐과 비움 없는 소원을 가지고 소원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곧 요술 램프인 샘이 되는 것입니다. 핵심이 빠진 소원을 강단에서 외치면서 여러분의 소원을 간절히 바라면 하나님이 이루어 주십니다라는 허무맹랑한 말을 목사도, 장로도, 권사도, 집사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소원은 그런 소원이 아닙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그리스도의 낮아짐과 비움을 믿는 성도이길 바라고 그런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기쁨을 두시고 일하시는 한 주간이 될 수 있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왜 기독교만이 기도 끝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로 끝맺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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